오정기 본지 회장
2026년 병오년(丙午年)의 붉은 태양이 떠올랐다.
격동의 세월을 건너온 한국 경제는 지난 20여 년간 숨 가쁜 성장을 거듭하며 선진국의 문턱을 넘었다. 하지만 오늘 마주한 새해의 공기는 사뭇 다르다.
한때 당연하게 여겼던 '우상향'의 믿음은 희미해졌고, 성장통이라기엔 너무도 묵직한 통증이 우리 경제의 관절 마디마디를 짓누르고 있다.
솔직해져야 할 시간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이미 예견되었으나 우리가 애써 외면해왔던 거대한 위험, 바로 '회색 코뿔소'다.
합계출산율 0.6명대 붕괴라는 숫자는 이제 충격을 넘어 상수(常數)가 되었다.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는 통계청의 차가운 그래프를 뚫고 나와, 산업 현장의 인력난과 내수 시장의 위축이라는 서늘한 현실로 우리 곁에 와 있다.
여기에 더해진 인공지능(AI)의 파고는 또 어떠한가. 지난 몇 년이 AI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기였다면, 2026년은 AI가 인간의 노동을 실질적으로 대체하고 재정의하는 '대체와 공존'의 원년이 될 것이다.
미·중 갈등 틈바구니에서 수출로 먹고살던 시절의 향수는 자국 우선주의라는 각자도생의 정글 앞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러나 외부의 파고보다 더 위태로운 것은 우리 안의 무기력증이다. 한국 경제가 처한 진짜 위기는 지표의 하락이 아니라, 과거의 '성공 방정식'에 갇혀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관성(慣性)에 있다.
우리는 선진국이 닦아놓은 길을 누구보다 빠르게 추격하는 '패스트 팔로어' 전략으로 기적을 일궜다. 하지만 2026년의 경제 지형은 벤치마킹할 교과서가 없는 황무지다.
길이 끝난 곳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함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20세기형 제조업 마인드와 낡은 규제, 경직된 노동 관행을 고수하고 있다.
혁신보다 안정을 택하고, 미래 비전보다 당장의 이해관계에 매몰된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올라탄 회색 코뿔소의 실체다.
이제 코뿔소의 등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야생의 들판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2026년 한국 경제가 다시 심장을 뛰게 하려면 뼈를 깎는 '퀀텀 점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금지된 것 빼고 다 해도 좋다'는 네거티브 규제의 전면화가 시급하다.
AI, 바이오, 우주항공 등 신산업 분야에서 기존 법령을 백지화하는 수준의 파격 없이는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더불어 노동 시장의 유연성과 사회적 안전망을 맞바꾸는 대타협도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이분법으로는 AI 시대의 유동적인 노동 형태를 담아낼 수 없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탄탄한 안전망 위에서, 고용과 해고가 유연하게 작동해야만 혁신의 싹이 튼다.
인구 정책 또한 출산 장려금 몇 푼을 쥐여주는 수준을 넘어, 과감한 이민 정책과 정년 연장 등 ‘축소 사회’에 적응하는 시스템을 완비하는 방향으로 대전환을 이뤄야 한다.
한국 경제의 역사는 위기론이 비등할 때 가장 강한 생명력을 발휘했다. IMF 외환위기가 IT 강국 코리아의 산파가 되었듯, 복합 위기에 처한 지금이야말로 낡은 껍질을 깨고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거듭날 절호의 '골든타임'이다.
두려움 대신 냉철함을, 안주 대신 도전을 선택하자. 2026년 병오년이 먼 훗날, 한국 경제가 '저성장의 늪'을 탈출해 초격차 국가로 도약한, 가장 뜨거웠던 한 해로 기록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