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기 본지 회장


대한민국 유통 생태계를 장악한 '공룡' 쿠팡을 바라보는 시장의 시선이 싸늘하게 식고 있다.

창사 이래 최대, 아니 대한민국 IT 역사상 최악의 보안 사고로 기록될 '3,370만 명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터졌음에도, 정작 회사의 실질적 지배자인 김범석 쿠팡Inc 의장은 또다시 침묵의 장막 뒤로 숨어버렸기 때문이다.

5일 유통 및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이번 사태는 단순한 해킹 사고를 넘어 기업 윤리의 붕괴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비화하고 있다.

지난 6월부터 5개월간 중국 등 해외 IP를 통해 전 국민의 65%에 달하는 개인정보가 빠져나가는 동안, '기술 기업'을 자처하던 쿠팡의 보안 시스템은 무용지물이었다.

더욱 공분을 사는 것은 경영진의 행태다.

사태가 공론화되기 직전인 지난 11월 중순, 거랍 아난드(Gaurav Anand) CFO 등 핵심 임원진이 보유 주식을 대거 매도해 수십억 원의 차익을 실현했다는 사실이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공시를 통해 드러났다.

시장의 화살은 자연스레 김범석 의장을 향한다.

김 의장 본인 역시 상장 이후 수천억 원 규모의 주식을 현금화해왔으며, 이번 사태에서도 별다른 사재 출연이나 책임 있는 수습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회사가 뚫리고 고객 정보가 유출되는 위기 상황에서 리더십은 실종됐고, 오너와 경영진의 '탈출 러시'만 돋보인 셈이다.

김 의장의 '책임 회피'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덕평 물류센터 화재,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 등 굵직한 사회적 이슈가 터질 때마다 그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한국 쿠팡의 지분 100%를 가진 미국 모기업 쿠팡Inc의 의장이자, 차등의결권을 통해 76%의 절대적 의결권을 행사하는 '진짜 주인'임에도, 법적 책임이 따르는 등기임원직은 전문 경영인들에게 맡겨둔 채 미국에 체류 중이다.

이러한 '검은 머리 외국인'식 경영 행태는 한국 시장에서의 규제 리스크를 피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으로 읽힌다.

이번 국회 청문회와 국정감사 증인 채택 과정에서도 그는 해외 체류를 이유로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할 가능성이 높다.

박대준, 강한승 등 각자 대표들이 고개를 숙이며 "송구하다"를 연발하는 동안, 정작 사태 해결의 키를 쥔 오너는 바다 건너에서 계산기만 두드리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3,370만 명의 이름과 주소, 연락처가 범죄에 악용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확산하고 있다.

이제는 김범석 의장이 응답할 차례다. 혁신의 아이콘으로 칭송받던 그가, 위기의 순간에만 숨어버리는 '비겁한 선장'으로 기억될지는 온전히 그의 선택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