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미국의 관세 폭탄을 피하기 위해 아세안과 남미 등 신흥국 시장 공략을 가속화하면서 한국 수출 전선에 비상등이 켜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내수 부진에 시달리는 중국 기업들이 '밀어내기식' 저가 수출에 나서자, 철강·기계 등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이 가격 경쟁력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제조업이 중국의 물량 공세와 기술 추격 사이에서 '넛크래커' 신세가 될 수 있다고 우려가 제기된다.
28일 한국은행이 공개한 '최근 중국의 수출국 다변화 가속화 현상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고강도 관세 폭탄이 중국 경제를 옥죄고 있지만, 중국은 예상보다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대미(對美) 수출길이 막히자 아세안, EU, 남미 등으로 물량을 쏟아내는 '수출국 다변화' 전략으로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중국의 저가·물량 공세가 한국의 주력 수출 시장인 제3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발(發) 공급 과잉이 전 세계로 전이되면서, 철강·기계 등 한국의 주력 산업이 '넛크래커'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 미·중 무역전쟁의 역설…중국, '수출 영토' 더 넓혔다
당초 시장에서는 미국의 관세 정책으로 중국 경제가 치명상을 입을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상황은 달랐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4월 이후 중국의 대미 수출은 26% 급감했으나, 오히려 EU·아세안·아프리카 등 비(非)미국권 수출이 12% 증가하며 감소분을 상쇄했다.
중국의 대응은 치밀했다.
먼저, '우회 수출'을 통해 중국과 공급망이 밀접한 아세안(ASEAN)을 경유지로 활용해 '중국→아세안→미국'으로 이어지는 수출 경로를 뚫었다.
실제로 올해 미국의 대중국 수입 비중이 줄어든 품목 대부분에서 대아세안 수입 비중이 늘어나는 현상이 목격됐다.
또한 '밀어내기 수출'을 통해 내수 부진에 시달리는 중국 기업들이 자국 내 남아도는 철강, 전기차, 배터리 등을 헐값에 해외로 퍼나르고 있다.
특히 전기차와 태양광 등 신산업 분야에서 중국의 생산 능력은 이미 글로벌 수요를 초과한 상태다. 이 물량들이 유럽과 신흥국 시장으로 쏟아지며 가격 파괴를 주도하고 있다.
# 아세안·남미서 한국산 설 땅 좁아져…철강·건설기계 '직격탄'
중국의 이러한 수출 다변화는 한국 수출 전선에 비상등을 켰다. 한국과 중국의 수출 경합도가 높은 신흥 시장에서 한국 제품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타격이 큰 분야는 철강과 건설기계 등 중화학 공업이다. 과거 한국의 독무대였던 아세안과 남미 시장에서 중국산 제품의 점유율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
보고서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철강 및 중장비 수출이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 시장에 편중된 반면, 중국은 아세안·중남미·아프리카 등으로 수출판로를 넓히며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일대일로(一帶一路)'를 앞세운 중국의 인프라 투자와 가격 경쟁력은 신흥국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에게 높은 진입 장벽이 되고 있다.
한국은행은 "중국이 내수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저가 수출을 확대하면서, 세계 시장에서 한국 주력 품목들이 가격 경쟁력 약화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 '독일의 눈물'이 주는 경고…"한국도 안전지대 아니다"
이번 보고서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제조업의 제왕'으로 불리던 독일의 몰락이 주는 시사점이다. 독일은 최근 2년 연속 역성장을 기록하며 ‘유럽의 병자’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독일 부진의 핵심 원인은 중국이다. 과거 독일산 기계의 최대 고객이었던 중국이 기술 자립에 성공하며 이제는 최대 경쟁자로 돌변했다.
여기에 저가 중국산 제품이 유럽 시장까지 잠식하고, 미국마저 관세 장벽을 높이면서 수출 의존도가 높은 독일 경제가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문제는 한국의 산업 구조가 독일과 판박이라는 점이다.
한국 역시 제조업 비중이 높고 대중국 의존도가 크다. 독일이 전기차·AI 등 첨단 산업 전환에 뒤처지며 중국에 추월당한 현실은 한국에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되어야 한다.
전문가들은 중국 제조 2025가 현실화되고 있는 지금, 한국이 기존의 범용 제조업에만 안주한다면 ‘제2의 독일’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중국이 막강한 제조업 기반에 AI 등 첨단 기술까지 접목할 경우, 한국 제조업의 글로벌 지배력은 급속도로 위축될 수 있다.
# "기술 초격차만이 살길"…구조적 대응 시급
미·중 무역 갈등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전망이다. 중국은 앞으로도 수출국 다변화와 '메이드 인 차이나'의 영향력 확대를 지속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경제가 이 거대한 파고를 넘기 위해서는 수출 시장 다변화는 물론, 기술 경쟁력 확보가 시급하다.
더 이상 가격으로는 중국을 이길 수 없는 만큼, 고부가가치 기술과 AI·반도체 등 미래 산업에서의 '초격차' 전략이 필수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중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5년 내 한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라며 "기업의 체질 개선 노력과 함께, 정부 차원에서도 전략 산업 육성을 위한 과감한 규제 혁파와 지원책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