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이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 대한 대책으로 1조 7,000억 원 규모라는 역대급 숫자를 내세웠다.
겉보기엔 천문학적인 금액을 쏟아부어 사죄하는 듯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피해 보상을 빙자한 대규모 '마케팅 행사'에 가깝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객의 불안을 잠재우기보다, 이 위기를 틈타 자사의 신규 서비스인 명품관(R.Lux)과 여행 상품을 띄우려는 꼼수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29일 쿠팡은 3,370만 명의 고객에게 1인당 5만 원 상당의 구매이용권을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총액 1조 6,850억 원, 숫자만 보면 국내 유통사 역사상 유례없는 통 큰 결단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5만 원의 구성 내역을 뜯어보면 쿠팡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 5,000원짜리 쥐꼬리 보상, 나머지는 "비싼 거 사라" 강요
쿠팡이 제시한 5만 원 중 소비자가 당장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실질적 보상은 단 10%인 5,000원에 불과하다.
생필품 등을 살 수 있는 쿠팡 전 상품 이용권은 5,000원으로 제한됐고, 나머지 4만 원(80%)은 '쿠팡트래블(2만 원)'과 명품관인 '알럭스(R.Lux, 2만 원)' 상품 전용이다.
문제는 트래블과 알럭스가 고가의 상품군이라는 점이다.
2만 원짜리 쿠폰을 쓰기 위해선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에 달하는 항공권이나 명품을 구매해야 한다.
사실상 '보상금'이 아니라,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할인 쿠폰'을 뿌린 셈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전 국민적인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겪고도, 이를 기회 삼아 평소 트래픽이 낮은 명품과 여행 카테고리로 고객을 유인하려는 계산속이 뻔히 보인다"고 꼬집었다.
# 탈퇴했는데 문자가 온다?…"내 정보 안 지웠나" 공분
더욱 심각한 문제는 보상 대상에 '탈퇴 고객'까지 포함했다는 점이다.
쿠팡은 "책임을 다하는 차원"이라고 포장했지만, 이는 개인정보 보호의 기본 원칙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다.
서비스를 탈퇴했다는 것은 내 정보를 삭제하라는 이용자의 명시적인 요구다. 그런데 쿠팡은 탈퇴한 고객에게 보상 안내 문자를 보내겠다고 밝혔다.
이는 쿠팡이 탈퇴한 회원의 전화번호 등 개인정보를 여전히 파기하지 않고 보유하고 있음을 자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유출 사고가 터져서 탈퇴했는데, 보상받으라고 연락이 오면 오히려 더 소름 끼칠 것"이라는 소비자들의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소비자단체 한 관계자는 "1조 7,000억 원이라는 거창한 숫자 뒤에 숨겨진 것은 자사 플랫폼 락인(Lock-in) 효과와 신사업 홍보라는 철저한 계산기 두드리기"라고 비판했다.
이어 "진정한 사과는 고객이 원하지 않는 고가의 여행·명품 쿠폰을 쥐여주는 것이 아니라, 유출된 정보가 어디까지 퍼졌는지 투명하게 밝히고 보안 시스템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것이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