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기 본지 회장
숨 가쁘게 달려온 2025년이 저물어가고 있다.
올해 한국 경제는 그야말로 '초(超)의 시대'였다. 생성형 AI는 텍스트를 넘어 영상과 물리적 제어의 영역으로 진입했고, '꿈의 에너지'라 불리던 소형모듈원전(SMR)은 빌 게이츠와 국내 기업들의 협력을 통해 실체 있는 미래 먹거리로 부상했다.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삼성과 애플, 그리고 빅테크들의 합종연횡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기술은 눈부시게 진화했고, 일상의 편의는 극대화됐다. AI 에이전트가 내 취향에 맞춰 차를 고르고 수출입 서류를 작성해 주는 세상이 코앞에 닥친 듯했다.
그러나 화려한 성장의 이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는 올해의 끝자락에서 '편의'라는 달콤한 과실이 '보안'이라는 뿌리가 썩으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목격했다.
크리스마스의 악몽처럼 다가온 거대 이커머스 기업의 개인정보 무단 조회 사태는 2025년의 상징적인 '경고장'이다.
이는 비단 특정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그동안 '혁신'이라는 미명 아래 '속도'만을 숭배해 오지 않았던가.
플랫폼이 주는 당장의 편리함에 취해, 나의 가장 내밀한 정보인 현관 비밀번호가 디지털 공간 어딘가를 떠돌 수 있다는 공포를 망각하고 있었다.
'빨리빨리' 문화를 동력 삼아 성장한 한국 경제가, 이제는 그 속도 때문에 치명적인 '신뢰의 위기'를 맞닥뜨린 셈이다.
거시 경제 상황도 녹록지 않다. 고금리의 파고 속에 소상공인과 중소 수출입 기업들의 한숨은 깊어졌다.
화려한 AI 기술의 발전 뒤에는 여전히 인건비와 임대료를 걱정하는 자영업자들의 고단한 현실이 있다.
기술 격차가 경제 양극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정책적 세심함이 아쉬웠던 한 해였다.
다가오는 2026년, 대한민국 경제의 화두는 단연코 '신뢰'가 되어야 한다.
더 빠르고 더 거대한 AI 모델을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이 안전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물류 속도를 자랑하는 것보다 시급한 것은, 고객의 정보가 철통같이 지켜지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일이다.
기업은 '보안'을 비용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 투자로 인식해야 한다.
정부 역시 보여주기식 규제가 아니라, 기술 발전을 저해하지 않으면서도 기본권을 침해하는 '구멍'을 막을 수 있는 정교한 룰 세팅에 나서야 한다.
2025년이 기술의 '근육'을 키운 해였다면, 2026년은 그 근육을 지탱할 '뼈대'를 튼튼히 하는 해가 되어야 한다.
사상누각(沙上樓閣) 위에서는 그 어떤 초격차 기술도 빛을 발할 수 없다. 기본으로 돌아가자.
'초거대'의 환호성을 넘어 '초신뢰'의 단단한 사회로 나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선진 경제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