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가 자국 반도체 기업들에게 신규 공장 증설 시 '국산 장비 50% 사용'을 사실상 의무화한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의 고강도 수출 통제에 맞서 시진핑 지도부가 꺼내 든 '공급망 완전 자립' 승부수가 본격화된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의 빈자리를 노리던 한국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은 미국의 제재와 중국의 국산화 장벽 사이에 끼인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30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중국 당국은 최근 반도체 제조사들의 생산 시설 확대 승인 조건으로 국산 장비 사용 비율을 최소 50% 이상으로 맞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공식 문서화된 규정은 아니지만, 최근 공장 건설이나 증설을 요청한 기업들에게 구두로 하달된 '불문율'이다.

기업들은 조달 입찰 과정에서 장비의 절반 이상이 중국산임을 입증해야만 당국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이번 조치는 지난 2023년 미국의 첨단 AI 칩 및 장비 수출 통제 이후 나온 가장 공격적인 대응책이다.

주목할 점은 미국, 일본, 한국, 유럽산 장비 수입이 자유로운 레거시(범용) 공정 분야에서조차 중국 정부가 국산 장비 사용을 강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지 관계자들은 "아직 국산화가 더딘 최첨단 공정에는 유연성을 두지만, 당국의 궁극적인 목표는 '100% 국산화'에 있다"고 전했다.

이 같은 거국적 자립 시도는 중국 반도체 생태계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중국 최대 장비 업체 나우라 테크놀로지(Naura Technology)는 최근 파운드리 1위 업체 SMIC의 7나노미터(nm) 생산 라인에서 식각(Etching) 장비 테스트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램리서치(미국)나 도쿄일렉트론(일본)의 독무대였던 미세 공정 시장에 중국 기업이 14나노를 넘어 7나노까지 진입한 것은 기술 추격 속도가 예상보다 빠름을 방증한다.

실제로 나우라의 2025년 상반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0% 증가한 160억 위안(약 3조 원)을 기록했고, 또 다른 장비 업체 AMEC 역시 44% 급증했다.

나우라의 2025년 특허 출원 건수는 779건으로 2020~2021년 대비 두 배 이상 늘었다.

중국 정부가 지난해 3440억 위안(약 65조 원) 규모의 '빅펀드 3기'를 쏟아부은 효과가 가시화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 불똥이 한국 경제로 튀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중국은 한국 반도체 장비 업체들의 최대 '큰손'이었다. 국내 업계는 미국의 제재로 미국·일본 장비 반입이 막힌 틈을 타 한국산 장비가 반사이익을 누릴 것으로 기대해왔다.

하지만 중국의 '50% 룰'은 이러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기술적 우위가 있더라도 중국 정부의 강제적인 자국산 우대 정책에 막혀 입찰 기회조차 얻지 못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단순한 수출 감소를 넘어, 미래의 강력한 경쟁자를 키우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중국 기업들이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거대한 내수 시장을 발판 삼아 레거시 공정을 넘어 첨단 장비 기술까지 확보할 경우, 향후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의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미국발 '공급망 배제'와 중국발 '자립화 족쇄'라는 이중고 속에, 한국 반도체 소부장 업계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