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기 본지 회장
국민의 피와 땀으로 만든 '공적 자금'은 결코 눈먼 돈이 아니다. 특히 고금리, 고물가 시대에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서민들에게 공기업의 방만 경영은 분노를 넘어 절망을 안겨준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를 향한 감사원의 정기 감사 보고서는 국가 자산 관리의 보루가 아닌, '총체적 도덕적 해이의 전시장'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번 감사 결과의 충격파는 단순한 업무 실수를 넘어, 캠코라는 조직 전체의 공직 기강과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가장 뼈아픈 대목은 '새출발기금' 운영 실태다. 코로나19 피해 소상공인의 재기를 돕겠다는 취지로 마련된 이 기금이, 사실상 고소득자와 은닉 재산을 가진 이들의 '빚 세탁소'로 전락했다는 사실은 국민에 대한 명백한 기만이다.
월 소득이 8,000만 원이 넘는 고소득자가 수억 원의 빚을 탕감받고, 심지어 가상자산(코인)으로 수억 원을 보유한 채무자까지 구제 대상에 포함됐다. 이들이 탕감받은 빚만 225억 원에 달한다.
캠코는 왜 코인 같은 변동성 높은 자산은 재산 조회 대상에서 제외했는가? 변제가능률이 100%를 초과해도 일률적으로 원금을 깎아주는 불합리한 감면 구조를 누가 만들었으며, 왜 고수했는가?
이 돈은 결국 성실하게 세금을 내는 국민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빚을 갚을 능력이 충분한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성실한 채무자를 바보로 만들고 국가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캠코의 방만함은 본연의 임무 수행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기업 구조조정을 지원하겠다며 조성한 '기업지원펀드'는 정작 자금난을 겪는 국내 기업을 외면하고, 재무 상태가 건전한 우량 기업이나 심지어 미국의 인공지능(AI) 유니콘 기업에 수십억 원씩 투자됐다.
국내 산업 생태계를 지키라는 국가적 미션은 온데간데없고, 수익률 극대화라는 사모펀드의 논리만 남은 셈이다. 이는 공공기관이 아닌 단순 투기 세력의 행태와 무엇이 다른가.
더 심각한 것은 내부 통제의 마비다. 국유지 무단점유를 방치하여 216억 원에 달하는 변상금을 공중에 날리는 무책임함을 보였다.
국가 자산 관리에 구멍이 숭숭 뚫린 와중에, 조직 내부에서는 정부의 정원 감축 기조를 비웃듯 승진 가능 인원을 멋대로 가산하여 '그들만의 잔치'를 벌였다. 인사 평가 점수를 임의로 누락하거나 순위를 조작한 정황까지 드러났다.
외부의 도덕적 해이를 막아야 할 공기관이 내부적으로는 인사 전횡을 일삼고, 국유지를 '눈먼 땅' 취급하는 총체적 난맥상을 보인 것이다.
캠코의 이번 사태는 일선 직원의 실수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제도의 설계부터 자산 운용, 내부 인사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조직의 근간이 병들었음을 의미한다.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직 사회의 암 덩어리가 된 캠코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시정 조치'가 아니다. 조직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재정립하는 '환골탈태(換骨奪胎)'만이 답이다.
감사원은 관련자에 대한 엄중한 문책과 함께, 재산 은닉의 수단이 된 가상자산을 포함하여 채무자 재산 조사를 대폭 강화하도록 시스템을 뜯어고쳐야 한다. 캠코 경영진 역시 국민 앞에 사과하고, 국책 금융기관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국민의 분노와 실망감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다. 공적 자금을 사금고처럼 여기고, 국민의 도덕적 양심을 희롱하는 공기업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강력한 구조 조정과 인적 쇄신 없이는 캠코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