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유럽연합(EU)에 대해 철강·알루미늄 관세를 낮추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EU의 디지털 규제 체계 수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EU는 지난 7월 양측이 합의한 관세 완화 조치의 이행을 촉구하고 있지만, 미국은 EU의 규제가 보다 균형적이어야 한다며 디지털 시장 규제가 지나치게 미국계 빅테크 기업을 겨냥하고 있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24일(현지시간) 브뤼셀에서 열린 회의에서 미국 상무장관 하워드 루트닉과 무역대표부(USTR) 제이미슨 그리어는 EU 측에 지난 7월 무역 합의 이행을 요구받았다.
해당 합의에는 미국의 EU 철강 관세 인하, EU의 미국산 제품 관세 철폐가 포함돼 있다.
그러나 루트닉 장관은 "EU가 보다 균형 잡힌 디지털 규제 체계를 마련해야 관세 조정이 가능하다"고 밝혔며 "규제가 합리적으로 조정된다면 EU로의 투자 유입이 크게 증가할 것"이라며 변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미국은 EU의 디지털시장법(DMA)과 디지털서비스법(DSA)이 사실상 미국 빅테크 기업을 겨냥하고 있으며, 플랫폼 기업의 콘텐츠 관리, 시장 지배력 제한 규정이 과도하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문제 삼아왔다.
EU 측은 즉각 반박했다.
마로시 셰프초비치 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은 "EU의 규제는 특정 국가 기업을 겨냥한 것이 아닌 모든 사업자에게 적용되는 공정한 규칙"이라며 "미국의 문제 제기에 대해 논의할 준비는 돼 있지만, 규제의 원칙은 유지될 것"이라고 말했다.
EU는 이미 내년 3~4월경 해당 관세 합의를 의회 및 회원국 승인 절차를 거쳐 이행할 계획이었지만, 미국의 반응이 미온적이자 불만이 커지고 있다.
EU 외교 당국자들은 미국이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대해 50% 관세를 유지하면서 400여 개 '파생 제품'(모터사이클·냉장고 등)에 관세를 적용하는 조치가 사실상 합의의 실효를 약화시킨다고 우려했다.
여기에 미국이 트럭, 핵심 광물, 풍력터빈 등 새로운 품목에 대한 고율 관세를 검토하는 움직임도 관측돼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EU는 자국의 와인·올리브·의료기기·바이오테크 등 더 많은 품목을 '트럼프 이전 수준의 저관세 체계'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은 EU가 먼저 미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철폐해야 논의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양측은 이번 협상에서 ▲디지털 규제 조정 ▲에너지 공급 협력(올해 EU의 미국산 에너지 수입은 2000억 달러 규모) ▲중국의 희토류·반도체 수출 규제에 대한 공동 대응 등도 함께 논의했다.
그러나 핵심 쟁점은 결국 '빅테크 규제'와 '철강 관세 교환'이라는 구조적 갈등으로 좁혀지는 모습이다.
무역 갈등이 장기화할 경우, 올해 복원된 양측의 경제협력 틀도 다시 흔들릴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