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기 본지 회장


창립 60년 효성그룹 역사에서 처음으로 오너 일가가 아닌 전문경영인이 회장 자리에 올랐다.

HS효성의 이번 인사는 분명 파격이다. 김규영 전 부회장을 신임 회장으로 선임하며 내세운 '역량 기반 리더십'과 '기술 중심 가치경영'이라는 명분만 놓고 보면 반론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이 인사가 명분 이상의 실질을 담고 있느냐는 점이다. 겉으로는 '파격'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오너 체제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정교한 안전장치에 가깝다는 의구심이 고개를 든다.

우선 70대 중반 기술 원로에게 '미래 혁신'의 방향타를 맡긴 결정 자체가 냉정한 평가의 대상이다.

김규영 회장은 스판덱스와 탄소섬유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그 공로는 분명하다.

하지만 효성이 새롭게 주력하려는 AI·DX, 초격차 첨단소재 산업은 한 세대 이상 younger한 리더십과 속도전이 필수 조건이다.

혁신 산업에서의 '연식 부담'은 결코 가볍지 않다. 만약 김 회장이 실질적 경영권이 아닌 '명예적 상징'에 머무른다면, 이번 인사는 현상유지형 카드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전문경영인 회장 체제의 독립성이 얼마나 실효적인지도 여전히 물음표다.

한국 재벌 구조에서 대규모 투자·M&A 같은 결정적 순간의 최종 키는 오너에게 있다. 이는 효성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단순해진다. 위기 시 모든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만약 김 회장이 '전면 책임자'라는 외피를 쓰고 실질 경영은 최대주주인 조현상 부회장이 좌우하는 구조라면, 이번 인사는 순도 높은 '책임 분산 전략'에 가깝다.

과거 수많은 대기업에서 보았듯 전문경영인이 경영 실패 시 '오너 리스크 회피용 방패막이'로 전락하는 사례의 반복일 뿐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효성은 김 회장 선임과 동시에 40~50대 AI·DX 인재들을 전면에 배치하며 세대교체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세대 혼합'인지, '역할 분담'인지, 혹은 '책임 분리'인지는 시간이 지나야 드러난다.

70대 기술 원로와 테크 기반 기획통이 조율 없이 공존할 경우 오히려 의사결정의 비효율과 책임 주체의 모호성이 심화될 수 있다.

결국 이번 인사의 핵심은 회장 교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너는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유지했는가"에 있다.

만약 이번 인사가 오너 체제의 부담을 줄이고, 향후 경영 변동에 따른 책임을 전문경영인에게 일부 이전하는 장치라면, 그것은 효성의 체질 개선이 아니라 또 다른 '전통적 재벌 문법'의 반복일 뿐이다.

효성그룹은 지금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김규영 체제가 단순히 명예적 역할을 넘어 실질적인 전략과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이번 인사는 결국 '오너 리스크 관리형 인사'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제 시장은 명분보다 결과를 요구한다. 효성이 진정한 변화를 선택했는지, 혹은 정교하게 포장된 안정적 통제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지는 곧 성과로 판가름 날 것이다. 칼날은 이미 벼려졌고, 시장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냉혹하다.